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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영어 원서 읽기 : 합본)

《레 미제라블》(프랑스어: Les Misérables)은 1862년에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로, 잘 알려진 19세기 소설 중 하나다. 제목인 레 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며, 대한민국에서는 《장발장》으로도 소개되었다. 프랑스 민중들의 비참한 삶과 1832년에 있었던 프랑스 6월 봉기를 소재로 하였다. 민중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사회개혁의지를 보여주는 사회소설 분류되기도 하나 실제로는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실천적인 해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기도 하다. 실례로 시민혁명에 동참했다가 정부군의 진압으로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장발장이 하수도를 통해 피신시키는 장면은 작가의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1] 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한 인간의 죄와 구원을 향한 열망을 보여주..
《레 미제라블》(프랑스어: Les Misérables)은 1862년에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로, 잘 알려진 19세기 소설 중 하나다. 제목인 레 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며, 대한민국에서는 《장발장》으로도 소개되었다.

프랑스 민중들의 비참한 삶과 1832년에 있었던 프랑스 6월 봉기를 소재로 하였다. 민중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사회개혁의지를 보여주는 사회소설 분류되기도 하나 실제로는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실천적인 해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기도 하다. 실례로 시민혁명에 동참했다가 정부군의 진압으로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장발장이 하수도를 통해 피신시키는 장면은 작가의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1] 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한 인간의 죄와 구원을 향한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줄거리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 전과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두의 박해를 받던 장발장은 우연히 만난 신부의 손길 아래 구원을 받고 새로운 삶을 결심한다. 정체를 숨기고 마들렌이라는 새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지내던 장발장은 팡틴과 마주치고, 죽음을 눈앞에 둔 팡틴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인 딸, 코제트를 장발장에게 부탁한다. 그러나 코제트를 만나기도 전에 경감 자베르는 장발장의 진짜 정체를 알아차리고, 오래된 누명으로 다시 체포된 장발장은 코제트를 찾아 탈옥을 감행했다. 테나르디에의 여관에서 혹사당하던 코제트를 구하고 자신이 키우기 시작했다. 자베르의 눈을 피해 수도원에서 포슐르방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며 코제트를 키웠다. 그러나 마리우스라는 청년과 코제트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한다. 장 발장은 처음엔 코제트를 뺐긴 것 같은 시기심에 사로잡혔으나 나중에는 마리우스에게 코제트에게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하고 자신이 전과자였음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장 발장은 자신과 함께 있으면 코제트가 위험해지므로 코제트를 마리우스에게 맡기고 그녀의 곁을 떠난다. 그러던 중 테나르디에가 장 발장에 대한 모함을 하려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마리우스에게 장 발장이 마리우스의 생명의 은인인 것을 알아채게 만들었다.(프랑스 6월 봉기에서 마리우스가 죽을 뻔한 것을 장 발장이 하수구를 통해 마리우스를 집으로 데려다 준 일. 에네르기파는 그 은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 마리우스가 코제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장 발장을 찾았을 때 장발장은 이미 코제트를 보지 못하는 슬픔에 죽어가고 있었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코제트와의 재회를 크게 기뻐하며 만족스럽게 삶을 마감한다.
빅토르 마리 위고 (Victor-Marie Hugo, 1802년 2월 26일 - 1885년 5월 22일)는 프랑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이다.

1802년 2월 26일 동부 프랑스의 브장송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고급장교로 알려지는 Joseph Hugo (1774–1828)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의 코르디에 기숙학교(Pension Cordier)에서 독서와 시 창작에 매료되었던 1815년 ~ 1818년 기간 중, 그는 일기에 “나는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기록함으로써 프랑스의 문호가 될 것을 10대 초중반의 나이에 다짐했다 한다.

1822년에 처녀시집 《송가집과 잡영집 (雜詠集. Odes et Poésies Diverses)》을 간행하고 그 해에 결혼하였다. 이후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 (Han d'Islande, 1823)》등, 정력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1825년 프랑스 왕실로부터 작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이 무렵부터 여러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기도 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간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졌다.

시집 《송가집과 발라드집(Odes et Ballades, 1826)》, 소설 《뷔그-자르갈(Bug-Jargal, 1826)》에 이어 1827년 희곡 《크롬웰 (Cromwell)》의 서문 발표를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서면서 낭만주의 작가들을 선도했다. 또,《동방시집 (Les Orientales, 1829)》, 《사형수 최후의 날(Le Dernier jour d'un condamné, 1829)》 등을 발표했다. 초기의 작품에는 왕당파적·가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하나 그 후 점차 자유주의 경향이 현저하게 되었다.

야심적인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지배하는 의고전파와 대립하여 당시의 문단에 발흥하던 낭만주의 운동에 참가하여 자택에 같은 경향의 젊은 작가와 화가를 모아 차차로 낭만파의 지도자가 되어갔다. 희곡 《크롬웰(Cromwell, 1827)》에 붙인 서문은 고전주의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연극이론의 선언서로서 유명하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 2월에는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의 초연에 즈음하여 낭만파와 고전파 간에 문학사상 유명한 '에르나니 싸움' (La Bataille d'Hernani. 또는 '에르나니 논쟁') 이 일어났다.
이 싸움에서 위고는 고전파의 방해에 대비하여 미리 수많은 동지를 '박수치는 사람'으로서 극장 안에 배치, 청년시인 고티에가 빨간 조끼를 입고 싸움의 앞장을 섰던 일화는 유명하다. 상연은 야유와 박수가 엇갈리는 가운데 별다른 지장 없이 끝나 낭만주의는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했다.

이 싸움승리 후에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를 압도하여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을 점유했으며, 위고는 더욱 왕성한 활동을 보여,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 1831)》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는 시집 《가을낙엽(Les Feuilles d'automne, 1831)》, 《황혼의 노래(Les Chants du crépuscule, 1835》, 《마음의 소리(Les Voix intérieures, 1837)》, 《빛과 그늘(Les Rayons et les ombres, 1840)》을 발표했다 . 희곡으로는 상연 금지를 당했던 희곡《마리용 들로름(Marion Delorme, 1831)》을 비롯하여 <왕은 즐긴다>(1832), <뤼크레스 보르지아(Lucrece Borgia)>(1833), <마리 튀도르(Marie Tudor)>(1833), 운문극 《뤼 블라스(Ruy Blas, 1838)》 등을 발표했고, 1841년에는 대망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843년 이후 10 여년간은 위고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활동에 전념하였다. 원인으로는 희곡 《성주들(Les Burgraves, 1843)》에 대한 혹평과 맏딸의 사고사를 들 수 있다. <성주들>은 13세기의 라인강 주변의 성주들을 주인공으로 한 서사적 색채가 강한 것으로 프랑스 극장에서의 초연은 낭만주의 연극에 염증을 보이는 관객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완전히 실패했으며 위고도 이후 극작을 포기하다시피 하여 낭만주의극은 실제로 그 생명이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또, 신혼이던 열아홉 살 맏딸 레오폴딘의 부부는 1843년 9월 4일 센 강 하류의 빌키에에서 보트 전복 사고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위고는 6개월이나 펜을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좌절과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1848년 2월 혁명을 비롯한 주위 정세에 자극을 받아 위고는 인도주의적 경향을 더 한층 굳혔다.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국외로 추방을 당함으로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을 전전, 거의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에 접어들어야 했다. 이 망명은 결실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이는 잡다한 일에서 해방되어 창작에 전념한 때문이다. 시집 《징벌(Les Châtiments, 1853)》, 《명상시집(Les Contemplations, 1856)》, 《세기의 전설 (La Légende des siècles, 1859)》(제1집),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62)》, 《바다의 노동자(Les Travailleurs de la Mer, 1866)》 등 위고에 있어서 걸작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나왔다.

1870년 보불 전쟁에 의한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함께 위고는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국민적 시인으로서 영예에 싸인 비교적 평온한 만년을 보낸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은 《두려운 해(L'Année terrible, 1872)》, 《세기의 전설》제2집, 제3집 (La Légende des siècles, 1877, 1883)》, 소설 《93년(Quatrevingt-treize, 187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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