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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현진건 장편소설)

적도 (현진건 장편소설) 서울의 봄은 눈 속에서 온다. 남산의 푸르던 소나무는 가지가 휘도록 철겨운 눈덩이를 안고 함박꽃이 피었다. 달아나는 자동차와 전차들도 새로운 흰 지붕을 이었다. 아스팔트 다진 길바닥. 펑퍼짐한 빌딩 꼭지에 시포(屍布)가 널렸다. 가라앉은 초가집은 무거운 떡가루 짐을 진 채 그대로 찌그러질 듯하다. 푹 꺼진 개와골엔 흰 반석이 디디고 누른다. 삐쭉한 전신주도 그 멋갈없이 큰 키에 잘 먹지도 않은 분을 올렸다. 이 별안간에 지은 흰 세상을 노래하는 듯이 바람이 인다. 은가루 옥가루를 휘날리며 어지러운 흰 소리는 무리무리 덩치덩치 흥에 겨운 잦은 춤을 추어 제친다. 길이길이 제 세상을 누릴 듯이. 그러나 보라! 이 사품에도 봄 입김이 도는 것을. 한결같은 흰 자..
적도 (현진건 장편소설)

서울의 봄은 눈 속에서 온다.

남산의 푸르던 소나무는 가지가 휘도록 철겨운 눈덩이를 안고 함박꽃이 피었다. 달아나는 자동차와 전차들도 새로운 흰 지붕을 이었다. 아스팔트 다진 길바닥. 펑퍼짐한 빌딩 꼭지에 시포(屍布)가 널렸다. 가라앉은 초가집은 무거운 떡가루 짐을 진 채 그대로 찌그러질 듯하다. 푹 꺼진 개와골엔 흰 반석이 디디고 누른다. 삐쭉한 전신주도 그 멋갈없이 큰 키에 잘 먹지도 않은 분을 올렸다.

이 별안간에 지은 흰 세상을 노래하는 듯이 바람이 인다. 은가루 옥가루를 휘날리며 어지러운 흰 소리는 무리무리 덩치덩치 흥에 겨운 잦은 춤을 추어 제친다. 길이길이 제 세상을 누릴 듯이.

그러나 보라! 이 사품에도 봄 입김이 도는 것을.

한결같은 흰 자락에 실금이 간다. 송송 구멍이 뚫린다. 돈짝만해지고 쟁반만해지고, 다님만해지고 댕기만해지고…… 그 언저리는 번진다. 자배기만큼 검은 얼굴을 내놓은 땅바닥엔 김이 무럭무럭 떠오른다.

겨울을 태우는 봄의 연기다. 두께두께 얼은 청계천에서도 그윽한 소리 들려온다. 가만가만 자최 없이 기는 듯한 그 소리, 사르르 사르르 깁 오리에 풀물이 스미는 듯. 이따금 그 소리는 숨이 막힌다. 험한 고개를 휘어넘는 듯이 헐떡인다. 그럴 때면 얼음도 운다. 찡 하며 부서지는 제 몸의 비명을 친다. 엉그름이 턱 갈라진 새로 파란 물결은 햇빛에 번쩍이며 제법 졸졸 소리를 지른다.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일)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조선(朝鮮)의 작가, 소설가 겸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延州 玄氏)이고 호는 빙허(憑虛)이다.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등 20편의 단편소설과 7편의 중·장편소설을 남겼다.
일제 지배하의 민족의 수난적 운명에 대한 객관적인 현실 묘사를 지향한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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