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녹두장군 이야기 (동학혁명 전봉준)
전봉준 全琫準 (1854 1895) 조선 동학혁명(東學革命)의 지도자.
초명은 명숙(明淑), 별명은 녹두장군(綠豆將軍). 창혁(彰赫)의 아들. 전북 태인(泰仁)출생. 아버지가 민란(民亂)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세 때 동학에 들어가 고부 접주(古阜接主)가 되고 각지를 다니며 동지를 규합, 한편 은거 중인 대원군(大院君)과도 접촉하며 국정 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1892년 조병갑(趙秉甲)이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부임,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근거없는 죄명을 씌워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던 중 수세(收稅)를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洑)를 축조, 불법으로 수세(收稅)를 징수하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힘에 의한 응징을 결심, 이듬해 1월 농민과 동학 교도를 이끌고 궐기, 관아(官衙)를 습격하여 강탈되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반환하고 부패한 이속(吏屬)들을 감금했다.이 보고를 받은 정부에서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使)로 보내어 선처를 확약하자 일단 농민군을 해산,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으나 이용태 역시 탐학이 심했으며 농민군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처벌을 감행했다.
이에 재봉기(再峰起)를 결의, 이 기회에 국가 정치와 사회제도의 전면 개혁을 단행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사상을 펼 뜻을 굳혔다. 이해 3월 동지 정익서(鄭益瑞)·김도삼(金道三) 등과 협의하여 동학의 조직을 이용, 동학 교도를 주도 세력으로 하고 농민대중의 호응을 얻어 진용(陳容)을 정비하고 고부의 백산(白山)을 근거로 8천여의 병력으로 대오(隊伍)를 편성, 동도대장(東徒大將)이 되어 척왜(斥倭)·척양(斥洋), 부패한 지배 계급의 타파 등 사대 강령(四大綱領)을 내세우고 부근의 군읍(郡邑)으로 진격, 관군(官軍)을 무찔렀다. 중앙에서 관군을 이끌고 온 양호 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을 황토현(黃土峴)에서 대파하고 이어 부안(扶安)·정읍(井邑)·고창(高敞)·무장(茂長) 등을 장악, 4월 28일에는 전주(全州)를 점령했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오고 동시에 텐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탐관의 응징, 시정(施政)의 개혁, 노비의 해방 등 12개 조목의 실현을 확약받고 일단 선유(宣諭)에 응하기로 결정하여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 후 20여 명의 간부를 인솔, 각지로 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 강화에 힘쓰는 한편 정부의 관헌들과 대등한 처지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金鶴鎭)과 도정(道政)을 상의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차지했다.
그러나 부패한 지배 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 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진전됨에 따라 점차 조선에서의 침략 행위를 더해가는 일본의 흉계에 격분, 다시 봉기했다. 9월 삼례(三禮)에서 남도 접주(南道接主)로 10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 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로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 구국(抗日救國)의 기치를 들고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때 중부·남부의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특히 이천(利川)·목천(木川)·공주(公州) 등지에서 혈전(血戰)을 벌였으나 우수한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배, 11월의 금구(金溝) 전투를 최후로 분쇄되고 말았다. 이에 수명의 동지들과 순창(淳昌)에 피신, 재기를 도모하다가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韓信賢) 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피로리(避老理)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이듬해 3월 사형당하였다.
*차상찬[車相瓚]
수필가 · 시인 · 언론인. 강원도 춘천 출생.
호는 청오(青吾).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졸업. 한때 모교에서 교직생활을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