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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亂)의 역사 (민란/변란/혁명 '난'의 한국사)

란(亂)의 역사 (민란/변란/혁명 '난'의 한국사) 민란, 변란 그리고 투쟁과 혁명을 부른 '난(亂)의 역사! *난(亂) : 백성들이 일으킨 폭동이나 소요, 전쟁이나 병란(兵亂) 민란(民亂)이란 봉건 체제의 신민이 생존에 위협을 받을 정도의 수탈을 당했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해 봉기 민요(民擾)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민란으로는 1811년(순조 11)에 홍경래(洪景來)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홍경래의 난〉과 1862년(철종 13)에 일어난 임술민란(壬戌民亂)를 들 수가 있다. 〈홍경래의 난〉은 1811년에 홍경래를 비롯한 평안도의 하급 지식인과 무사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17세기 이후 평안도 지역은 주로 상업을 통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지방사회의 전반적인..
란(亂)의 역사 (민란/변란/혁명 '난'의 한국사)

민란, 변란 그리고 투쟁과 혁명을 부른 '난(亂)의 역사!

*난(亂) : 백성들이 일으킨 폭동이나 소요, 전쟁이나 병란(兵亂)
민란(民亂)이란 봉건 체제의 신민이 생존에 위협을 받을 정도의 수탈을 당했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해 봉기

민요(民擾)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민란으로는 1811년(순조 11)에 홍경래(洪景來)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홍경래의 난〉과 1862년(철종 13)에 일어난 임술민란(壬戌民亂)를 들 수가 있다.

〈홍경래의 난〉은 1811년에 홍경래를 비롯한 평안도의 하급 지식인과 무사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17세기 이후 평안도 지역은 주로 상업을 통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지방사회의 전반적인 역량이 크게 성장하였다.

특히 남쪽 지방과 달리 신분차별이 심하지 않았으므로 하층 인물이 지식과 무예를 닦아 성장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세도정치 아래서 그들이 정치·사회적으로 진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에 불만을 품고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욕구를 갖게 되었다. <출처 및 인용: 민란 [民亂] (두산백과)>

[농민과 노비의 난]
의종 때의 사치와 유락(遊樂)은 국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왔고, 이는 농민 수탈의 강화를 초래했다.
이에 도탄에 빠진 농민들은 지배체제의 문란과 무신들의 하극상 풍조에 자극되어, 신분해방과 지배층의 압박·수탈에 항거하기 위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12세기초부터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케 하던 유민들은 무신난을 전후하여 전국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명종 2년(1172) 평안도의 창주(昌州, 昌城)·성주(成州, 成川)·철주(鐵州, 鐵山) 등지에서 지방관의 횡포에 분격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그 뒤 묘향산을 근거로 조위총(趙位寵)의 남은 무리들이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반란을 계속하였다.
온누리역사연구소 편엮
<출처 및 인용>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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