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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리스도교 전파.박해.수난 (수난을 통한 성장의 역사!)

한국 그리스도교 전파.박해.수난 (수난을 통한 성장의 역사!) 수난을 통한 성장 ―― 예언자적 종교가 언제나 수난을 당해 왔다는 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한국의 그리스도교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으며, 많은 수난을 통해 교회는 더욱 성장해 갔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세 번이나 큰 수난을 겪어야만 했는데 1801년의 이른바 신유교난(辛酉敎難)과 1839년의 기해교난(己亥敎難), 그리고 1866년의 병인교난(丙寅敎難)이 그것이다. 신유교난과 기해교난 때에도 각각 수백 명의 순교자를 냈거니와, 흥선대원군이 지휘한 1866년의 병인교난에서는 3년을 두고 8,000여 명의 순교자를 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를 통해 교회는 위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찬 성정을 가져왔다. 통계에 의..
한국 그리스도교 전파.박해.수난 (수난을 통한 성장의 역사!)

수난을 통한 성장 ―― 예언자적 종교가 언제나 수난을 당해 왔다는 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한국의 그리스도교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으며, 많은 수난을 통해 교회는 더욱 성장해 갔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세 번이나 큰 수난을 겪어야만 했는데 1801년의 이른바 신유교난(辛酉敎難)과 1839년의 기해교난(己亥敎難), 그리고 1866년의 병인교난(丙寅敎難)이 그것이다.

신유교난과 기해교난 때에도 각각 수백 명의 순교자를 냈거니와, 흥선대원군이 지휘한 1866년의 병인교난에서는 3년을 두고 8,000여 명의 순교자를 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를 통해 교회는 위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찬 성정을 가져왔다. 통계에 의하면 1866년에 신도수가 2만3,000명이었다고 하니 박해가 끝날 무렵엔 1만 5,000여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1900년에는 4만 2,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10년 후에는 7만 3,517명으로 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에는 신도수 3백만을 헤아릴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다.
신교의 경우에도 두 차례에 걸쳐 큰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하나는 1930년대로부터 일제 말엽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관헌에 의한 박해였다. 일본의 민족종교인 신도(神道)신앙을 강요함으로써 박해의 실마리를 만든 일본정부는 장기에 걸쳐 탄압을 자행하였다.

또 하나는 해방 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받은 박해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나 공산독재정권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뒷받침하는 신앙체제를 가진 그리스도교를 말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들은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힘을 발휘하면서 더욱 성장해 갔다.
*종교역사연구회 편엮: 바른 종교역사 연구회
<출처 및 인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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