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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과 정향 vs 광공자 (같은 인물, 다른 작품! 동시에 읽는 소설 : 양녕대군 열전)

양녕과 정향 vs 광공자 : 같은 인물, 다른 작품! 동시에 읽는 소설 - 양녕대군 열전! * 같은 인물, 다른 작품(다른 느낌)을 한 권으로 함께 있는 E-BOOK 시리즈 입니다. * <김동인> 작가의 "양녕과 정향" / "광공자" # 부록: - 홍윤성과 절부 (윤백남 작품) - 양( = 수양) - 김동인 작품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 ~ 1462년 9월 7일)은 조선 시대 초기의 왕세자이자 왕족, 정치인, 화가, 시인이다.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1]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
양녕과 정향 vs 광공자
: 같은 인물, 다른 작품! 동시에 읽는 소설 - 양녕대군 열전!

* 같은 인물, 다른 작품(다른 느낌)을 한 권으로 함께 있는 E-BOOK 시리즈 입니다.

* <김동인> 작가의 "양녕과 정향" / "광공자"
# 부록:
- 홍윤성과 절부 (윤백남 작품)
- 양( = 수양) - 김동인 작품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 ~ 1462년 9월 7일)은 조선 시대 초기의 왕세자이자 왕족, 정치인, 화가, 시인이다.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1]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그가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그는 문 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한탄하였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고 만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최종적으로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전승도 전한다. <위키백과 : 발췌 및 인용>

# 홍윤성(洪允成, 1425년 ~ 1475년 음력 9월 8일[1])은 조선의 문신이다.
1455년 세조 반정 직후 좌익공신 3등이 되고 예조판서 등을 거쳐 모린위 여진족의 난과 건주위 여진족의 난을 토벌하고 우의정을 지냈다.

* 작가 : 김동인(金東仁)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1919년의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전향 의혹이 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생애 후반에는 불면증, 우울증, 중풍 등에 시달리다가 한국 전쟁 중 죽었다.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 작가 : 윤백남(尹白南)
1888년 11월 7일 ~ 1954년 9월 29일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예술인이다.
배우, 극작가, 소설가, 언론인, 영화감독, 연극 제작자, 영화 제작자 등을 다양한 직업을 겸했다. 본명은 윤교중(尹敎重)이다.

《매일신보》에 단편소설 《몽금》을 발표하였고, 1920년대 후반부터는 소설 창작에 몰두했다. 1930년에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대중소설인 《대도전(大盜傳)》을 연재하였고, 큰 인기를 끌면서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30년대에는 야담 운동에 뛰어들어 많은 야담 작품을 발표했고, 1934년 10월 월간지 《야담》을 창간하였으며, 1937년에 만주로 이주해 역사 소설을 썼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귀국하여 조선영화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3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맡고 대한민국예술원 초대 회원을 지냈다.

연극, 영화,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 문화의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한 계몽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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